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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비둘기부대 참전 태권도제자들  

 

1966년부터1969 년까지 150명이 넘는 제자들을 가리키고

 1969년도 제자들이 일일이 써준 감사편지와 사진을들고 귀국 했던 최동호씨 언제가는

꼭찾이가서 만나 보겟다는 생각으로 39년세월을

보내다가 당시써준 제자들의 감사 편지와 수십장의 빚바란 사진을들고 베트남 디안을 와보니

150명 제자중에는 베트남 남부장교로 근무하다 총살당한 제자도있고 파이롯트로 근무하다

디안지역에서 장사을 하고있는제자도 나을반겨주고

1975년 해방당시 미국으로 피신하여 지금은 성공하여 살고있는여려명의

제자들 단발머리 여자제자는 디안중학교 교장선생님 되어 성공하여 나을반겨주고

당시에도 코메디처럼 웃음을 주고 태권도도 무척잘하던

제자는 디안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어 한걸름이 달려와서 거수경례로 반겨주고

얌전하기만 하던이쁜 여자제자는 디안지역에서 호텔을 운영하고있으면서

 선생님이 오셨다고 연락을 받고 한걸름에 달려와 선생님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기관사로 근무하고있는제자도있고 수많은 태권도 제자들이

39년전 선생님이 왔다는 연락을 받고 모여들고있다

 

1969년당시 최명신 주월사령관이 최동호씨 제자들에게 주었던 태권도  단증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제자들이 고맙기만하다

멀리떨어져있는 제자들한테서 걸려오는 전화을 받고있는 최동호씨 전화을 받고나서야 39년전에

사용하던 베트남말이 한마디씩 기억나는지 어설푼 베트남말이 뛰어나오기 시작한다

한명한명 HAI(하이) 제자들과 만나면서 옛날사진으로 확인 하고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최동호씨

위제자는 (HAI 하이)

당시 제자사진   지금은 베트남유명 우유회사 사장으로 제직중인 (hai 하이)

당시 코메디같이 웃기던 제자는 디안고등하교 교장선생님 되어 

한걸름에 달려와서 태권도 선생님을 반겨주고 (위사진은 디안교등학교 교장(phe 페)

어릴적 최동호 선생님이 가저온 사진을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신기한듯 바라보고 있다

당시 디안시장에서 장사을 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던 홍생씨 는  미국에서 살고있고

당시 5살짜리 꼬마는 40대로 변하여 최동호씨 가 왔다고 옛날 꼬마사진을 바라보고 있고

(사진이름 LE 레)

당시 너무이뻐서 태권도 도복을 만들어 입혀주고 태권도 도장으로 대리고 다니던  꼬마 지금은   

40대초반으로 변해서 선생님을 반겨주고 있다

                       당시디안중학교 태권도부 제자들 모습

베트남 남부군 파이롯트로 근무하다 지금은 가구 도매상을 하고있는 제자 (KY 키)

                 당시에 비둘기 부대는 베트남 철도제작창 으로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 39년만에 뵙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디안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제자들이 초청으로 디안에서 가장큰 식당에서 점심겸 파티가 벌어지고있다

얌전하기만 하던 단발머리 여자제자는 백발이 햐얀 할머니가 되어서 선생님을 맞아주고있다

           소식을 듣고 한사람 한사람씩 식당으로 모여든 태권도 제자들

              디안중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근무고있는 여자제자 (NGA 야)

          당시 디안중학교 여자제자 사진 (현제디안중학교 교감선생님)

              또한제자가 �아와서 선생님을 부둥켜안고 즐거워 하고있다

선생님과 제자들이 40년만에 불러본  아리랑 아직도 잊지않고 한국의 아리랑을 부르고있다

마이는 현제 디안지역에서 호텔 운영하고있다 당시에도 복스럽고 얌전했다고한다 (BAY바이)

늦게 도착한 여자제자는 호텔사장으로 성공하여 옛날사진을 보고있다

제자들이 급히마련한 금반지 두돈과 선물을 선생님에게 전달하고 있다

                   함께 모인제자들과 같이기념사진 을찍었다

                                               여자들과 기념사진

              www.vietnamgo.co.kr     베트남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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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warstory.tistory.com Sergeant Lee Sergeant Lee

2008년 7월미국에서 한통의 국제전화가 걸러온다

 

여 보세요 이남원 씨 되십니까?

 

예 제가 이남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명우 라고 합 니다

 

저는 70년도에 월남에서 민사심리전 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한국군 초급장교로 세번 파병했습니다 1973년 3월20일 사이공

 

롱빈기지 공항에서 마지막 철수했니다

 

아~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 번호 을 알고 전화 을 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고 미국 에 계신 정우진씨 하고 가깝게 지내고 미국 동부와 남부로

 

 멀리 떨어저 살고 있습니다 만은 같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전우로써 

 

자주전화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전 정 우진씨가 저한테 38년만에 베트남 다녀온 이야기 을 너무도 감동 깊게

 

해줘서 이남원 전우님 전화 번호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예 그렇군요 

 

그런데 부탁 있어서 전화 했습니다

 

다름 아니고 1970부터 1973년까지 주월사 민사심리대 파견대장 으로

 

근무할 당시 알게된 사이공대학 법과대학에 다이던 베트남 여대생을 찾고

 

싶어서 전화 했습니다 

 

꼭 찾아서 만나보고 싶습니다

 

35년전 사이공대학에 다니던 여대생을 찾을수 있을까요?

 

당시에 살고 있던 동래와 지역을 기억하십니까?

 

예 기억 합니다 이름은 뚜익입니다 당시에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살던 곳은 베트남 동나이성 빈증 지역으로 기억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살면서 뚜익 을 찾기 위해 15년전 과 10년전에 미국에 살고있는

 

사이공 출신 베트남 태권도 제자들을 보내서 몇번 찾아보앗으나

 

베트남이 북으로 통일되면서 행정구역이 많이 바뀌어서 찾지을 못 했습니다 

 

포기하고 있던중 정우진 씨가 투이호아 지역에서 근무할 당시 부대근처 마을이장님을

 

살아생전 만나 보려고 미국에서 베트남 로 가 이남원 씨 도움으로 이장님

 

아들과 마을사람들 로 부터 환영과 큰대접도 받고 왔다고 자랑을 하는데

 

감동 적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남원씨 연락처을 알게되어 습니다 

 

지금 씀 50대 중반씀 되었고  남편도 있을거고 자식들도 있을줄압니다 그러나

 

꼭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도 월남만 생각하면 항시 여대생 뚜익 이 생각나고 사이공과

 

닌호아 지역이 생각납니다 

 

35년 동안 투익 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1973년 3월20일 마지막으로 철수당시 투익이 롱빈기지 공항까지 오토바이 로 

 

 타고 군용차 뒤을따라와서 

 

 롱빈기지에서 마지막 슬피 울면서 한국에 가시거던 꼭돌아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울던모습이 평생을 잊지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사이공과 닌호아 지역은 제가 초급장교시절 월남 전쟁에 참전했던 지역입니다

 

이명우 씨 알았습니다 한번 찾아 보 겟습니다 

 

예 알았 습니다 부탁 합니다 사진과 이름은 메일로 보내게 습니다

 

             태권도 교관단으로 월남 전선으로 파병

 

 

월남전선으로 부산항을 떠나는 미국수송선

 

1967년 이명우 소위는 태권도 교관단 소속으로 월남전쟁에 파병되어 닌호아

 

월남군 특수부대에 태권도 교관으로 부임한다 

 

월남군 특수부대 원들을  상대로 태권도 을 전수시키고 69년도 1차 귀국한다

 

1970년 대위로 진급하여 월남에 2번째 파월하여 주월사 민사심리대 파견대장으로

 

근무하고 1971년도에 한국으로 귀국한다

 

 1972년 3번째 파병되여 나트랑 야전사령부 강원채 장군이 지위하는 부대소속으로

 

비둘기 부대 민사 심리대 파견대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민사 심리대 파견대장으로 근무당시 이명우 대위 

                     뚜익과 이명우대위의 첫만남

 

1972년 월남의 따가운 열대지방 햇살이 내려쬐는 일요일 오후 사이공 럴러이 와

 

동커이 거리는 미군과 연합군 한국군이

 

외출을 즐기고 있었다 근처에는 미군전용 호텔이 있고 2키로 후방에는

 

주월 사령부가 있으며 일요일이면 동거이거리와 럴러이 거리는 외출나온

 

군인들로 붐비고있다

 

이명우 대위도 쩔렁에 있는 주월사 장교숙소을 나와 야시카 카메라을 메고

 

동거이 거리에 있는 노천카페에서 월남어름 커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있다

 

잠시후 햐얀 아오자이 을 입고 피부색이 유난히 희고 예쁘게 생긴  

 

월남 아가씨가 왼손에 두툼한 책을 들고 긴머리을 찰랑이며 노천 카페에 들어온다

 

카페에 들어와서  이명우 대위 옆자리 앉는다 20대 후반의 젊은 장교는 잠시

 

전류에 감전되듯 멍하니 아오자이 입은 아가씨를 처다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친다

 

아오자이 아가씨는 생끗 미소 을 지으며 안녕 하세요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할줄 아세요

 

네 저는 비둘기 부대 PX 선물 쎈타에서 낮이면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인 같이서 한국말로 인사 했습니다

 

아~그러세요 그런데 학생 입니까?  두툼한 책이 학생같아서요

 

예 사이공대학  법과대학  학생입니다

 

이렇게 이명우 대위와 투익은 동커이 거리 노천카페 에서 첫 만남이 있었다

 

 

                               사이공 법과 대학 시절 뚜익 22세

 

                             사이공 법과 대학생 뚜익

 

1972년 뚜익은 사이공대학 법과 야간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고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월남군 장교로 있는 오빠와 언니 1살짜리 조카 아버지가 동나이성

 

작은 마을에살고있다

 

낮이면 투익은 동나이 디안면에 있는 비둘기부대 내 PX 선물 쎈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밤이면 오토바이로 사이공 대학 법과대학에 다니고있다

 

 

               35년전 이명우 대위가 처음 만나서 찍어준 뚜익 22세 칼라사진

 

비둘기부대 PX 선물 쎈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배우게 된다

 

3번째 월남 전쟁에 파병된 이명우 대위는 아직 보직을 못받고 쩔렁 에 있는 주월사

 

장교 숙소에서 대기 하던중 1972년 주월 사령부 민사심리전 부대 비둘기부대

 

파견대장으로 발령을받는다

 

민사심리전대 비둘기 부대 파견대장으로 근무 하게된 이명우 대위와 뚜익은

 

비둘기부대에서 다시만나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사랑을 나누게된다   

 

부대원들이  알까봐 조심스럽게 일요이면 사이공시내와 담샘 공원 에서

 

 데이트 을 즐기고 뚜익 집에 찿아 가서 부모님에게 인사을 하고 장래 까지

 

약속한게된다

 

                            이명우대위 마지막 월남에서 철수

 

1973년 3월20일 한국군인을 태우고갈   미군 군용기가 롱빈 보급창 기지에

 

대기 중이다

 

이명우 대위는 주월사 마지막 철군요원으로 비둘기부대에서 뚜익과

 

작별인사을 하고있다

 

뚜익은 오토바이로 롱빈 기지창 까지 군용차량을 따라와서 이대위와 마지막

 

 작별 인사을 한다  

 

몇년이 되어도 기다리 겠습니다  사랑 합니다  꼭 돌아오세요 알았소 한국에

 

 돌아 가서  전역을 하고 찾아오겠소 전쟁도 곳끝날것이요

 

군용기가 롱빈기지 할주로을 요란한굉음을 울리며 하늘위로 날아간다 

 

 뚜익은 군용기가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흐르며 배웅 을 한다

 

73년 이명우 대위는 한국에 도착하여 육군 본부에 전역신청을 하게된다

 

 전역을  기다려도 육군본부에서는 특수요원으로 3번이나 월남전선에 파병된

 

유능한 장교라고 전역을 시켜주지않는다

 

1974년 베트남 전쟁은 중부지방까지 월맹군에 함락되고 전세가 무척

 

불리 하다는 소식이다

 

74년 다시 전역 신청을 하고 전역을 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뚜익은 미국에서

 

자리잡으면 연락할 생각이다

 

미국 시애틀에 도착한 이명우 씨는 태권도 9단의 실력으로 시애틀 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성공하게된다

 

1975년 월남은 월맹군에게 완전 함락되고 투익과 영원히 이별 하게된다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면서 월남출신 제자들도 많이 생겨서 15년전부터

월남출신 제자들을 사이공으로 보내서 뚜익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를

 

못하게된다     

 

                      뚜익을 찾아나서다 

 

                            뚜익씨 22세 대학시절사진

메일로 받은 35년전 사진한장 달랑들고 3일동안 호치민시내와  동나이 지역 빈증

 

지역 수소문하고 돌아다녔지만 허탕만 치고 마지막으로 디안지역을 찿아가서

 

수소문하던중 드디어 현지인 할머니가 아는 사람같다고 알려준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뚜익을 극적으로 찾을수 있었다

 

뚜익을 찾아서 만나 보니 이명우 씨와는 첫사랑을 한 남자며  지금도 무척보고

 

싶다고한다

 

그렇게 오랜세월 기다렸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

 

첫사랑의 한국군 대위가 다시 베트남으로 자신을 찿아올  희망을 갖고

 

꼬박 10년을 기다렸으나

 

찾아 오지 않아서 34세가 되는해에  베트남 남자와 결혼을 해 22세된 딸을 두고

 

 있고 결혼한 베트남 남자는 

 

15년전에 행방불명 되었다고 한다

 

1975년 베트남이 북으로 통일되면서 베트남군 장교인 오빠는 전사하고

 

 같이살던 언니도

 

어린 조카만 나두고 세상을 떠나 77년부터 어린조카딸을 친딸처럼 돌보며

 

결혼시켜서 지금도 같이 살고 있다

 

오빠가 월남군 장교이고 투익역시 한국군 부대에 근무경력 때문에 직장도

 

잡을수 없었고 목슴만 연명할수 있는 

 

배급으로 살아가면서 배고품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이 도이모이 정책으로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하고 한국공장들이

 

베트남으로 들어오면서 

 

한국말 통역을 구한다는 광고을보고 한국공장에  이력서을 제출하고

 

한국공장에서 통역관으로 

 

2005년까지 10년동안 근무을 하게된다

 

몸이 아파서 3년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있는 중이라고 한다

 

몇 년째 몸이 아파 직장도 없이 고생을 하면서 나에게 한국말 통역자리을

 

소개시켜달라고 한다

 

미국 이명우씨 에게 뚜익을 찾았다고 연락하고 현제 직장도 없이 여자혼자

 

 가장으로 어렵게 살고있다고 

 

전해준다  투익은  한국말을 아주 잘합니다 전화 해보세요

 

뚜익 전화 번호을 알려주니  고맙다며 호치민에 빠른 시일에 오겠다고 한다

 

                   이명우씨가 감사의 메일 

 

이 사장님께
 
보내주신 e-mail 과 사진 잘받았읍니다. 정말 수고 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쉽게 찾을줄 몰랐읍니다.  역시 실력이 대단 하십니다.
 
뚜익 하고 한시간 이상 통화했읍니다.  무어라고 표현할수 없는 감격의 순간

 

이었읍니다.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35년 이라는 세월이 너무나 많은것들을 변화 시켰음을  
 
실감케 하는군요.        다음달  11월 20일 쯤 한국에 들렸다가  베드남에 

 

방문 할 예정입니다 이사장님을 만날 생각하니 기대가 되는군요
 
 
제 e-mail 주소가 변경 되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이 명 우 전우 드림

 

이명우씨는 하루에 한번씩 뚜익과 전화 통화을 하면서 22세 딸아이가

 

대학교 2학년이고 현제 투익이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투익씨 딸 학비와  병원비에 보태 쓰라며 usd 5.000을

 

송금 해주었다고 한다 

 

 

                              35년전 사진의 사진보고 있는 투익씨

 

이명우씨는 베트남에 2008년 11월22일 아세아나 비행기로 호치민에 도착

 

예정으로 비행기 예약 를 해놓고 

 

뚜익씨 와는 하루에 한번 씩 미국에서 베트남으로 전화통화 을 하면서 11월22일

 

13시20분 사이공 탄산루트 

 

공항에서 서로가 만나기로 약속이 되 었다

 

2시간 전에가서 공항에서 기다리겟습니다

 

 

                        35년전 이명우 대위 씨사진을 보고 즐거워하는 뚜익씨

 

2008년 11월11일 낯12시 울먹인 목소리의 베트남 아가씨의 전화 목소리

 

이남원 씨입니까? 

 

예 제가 이남원입니다 명함을 보고 전화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하셨나요? 저는 뚜익씨 딸 되는 사람인데요

 

my mother die yesterday night  우리 엄마가 어제 밤에 죽었습니다

 

my mother die    my mother die 

 

계속 우리 엄마가 죽었다고 반복하면서 울고있는 전화 목소리

 

전화 통화를 끊고 베트남 통역관을 시켜서 왜 무슨 일로 어머님이 죽 어느냐 고 

 

자세히 물으니 어머님이 평소에 유방암으로 고생하고 있던중 35년 만에

 

이명우씨 소식을 듣고 만날 날만 기다리다 

 

이명우씨를  만나기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볼려고 수술을 했으나 ............. 죽었다고 합니다

 

잠시후 미국에서 이명우씨 전화 이남원씨  지금 뚜익한테  전화을 하니까

 

뚜익 딸이 전화을

 

받으면서 우리엄마가 어제저녁 죽었다고 울면서 애기을 하는데 무슨 사연인지

 

알아봐 주세요

 

예 저도 지금 막 딸한테 연락 받았습니다   

 

베트남 통역관이 그러는데 어제 저녁 갑자기 죽었다고 하네요 

 

뭐요 사실입니까 ?

 

예 자세히 알아 보았는데 사실입니다

 

아~이것이 무슨 운명이 이렇습니까?

 

몇일만 기다리고 있으면 10일후면 내가 베트남에 들어가는데 나을 만나보고

 

가든지 ...........

 

후~말문이 막힌니다 

 

그러나 예정대로 호치민에 들어가서 뚜익 영원이라도 만나 보겠습니다

 

 

뚜익씨 딸 22세 대학생이 어머님이 사랑하던 한국군 장교의 사진을 들고

 

이명우씨를 기다리고있다

 

 

처음보는 분이지만 엄마를 대신해서 꽃다발을 전해주는 뚜익씨딸

 

35년전 22세된 사이공 대학교 학생을 만나서 사랑을했고 지금은 투익은 

 

저세상으로 가고 

 

엄마의학생시절과 똑같은 나이에 사이공 대학교 여학생인 뚜익 딸이

 

엄마의 옛 애인을 맞이하고있으니 세상에는 이런 사연도 있을까?

 

35년전 찍은 육군대위 사진을 들고 엄마대신 이명우 씨을 기다리고 있다

 

건장한 체격의 노신사가 공항문을

 

나서는 순간 투익씨 딸은 어떻게 이명우 씨을 알아보았는지 꽃다발을 들고

 

이명우 씨에게 달려가서 돌아가신 엄마대신 꽃다발을 전해드린다 공항에는

 

뚜익씨 조카 와 가족들 같이 나와서 이명우씨을 반갑게 맞이하고있다

 

 

                           투익씨 조카딸가족과 통역 미스쫍

 

비둘기 부대가 주둔 했던 디안면 지역 비둘기 부대 예하 부대가 주둔했다는

 

부대자리는 지금은 공동 묘지로 변하고 뚜익도 그 자리에 묻혀있다

 

 

                             현재 단장중인 뚜익묘소에서 이명우씨

 

35년만에 수만 키로를 날아왔는데 싸늘한 세멘바닥 밑에 잠들다니 믿어 지지가않는다

 

11월9일 미국에서 전화 했을때 우리만나서 동커이 거리도 가보고 담샘 공원도 

 

가보고 닌호아 와 나트랑도 같이 여행하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그때 그 목소리 그것이마지막 유언이었을까?

 

송금 해준 돈으로 딸 앞으로 2년 동안 대학 학비도 해결 했고 딸이 대학들어 갈때 은행에서 받은 융자도 해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저는 이제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한국말로 또렷이 들러오는 전화 목소리 그날 전화가 이명우씨와 뚜익씨에 마지막 대화내용이다

 

이명우씨는 한창 단장중인 뚜익 묘지에 찿아서 천국에 가서라도 행복하게 살라고 우리의 이생에 인연은 여기까지가 끝인것같다 천국에가서 다시만나자

 

 

                        뚜익집에 모셔져있는영정

 

 

뚜익이 이명우 대위을 기다리던 집에 들려 뚜익영정 앞에 35년동안 이루지못한

 

 사랑을 잎마춤으로 대신한다

 

 

 

35년전에 뚜익과 같이 데이트을 했던 럴러이 거리와 동커이 거리을

 

다시한번 찿아보고 이명우씨는 한국을 거처서 12월2일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35년전 럴러이거리  뚜익과 이곳분수대 앞에서 만나서 데이트을 즐기던곳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베트남 전쟁이 만들어낸 한국군 장교와 미스사이공  여대생과 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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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비둘기부대참전 태권도제자들(2)  

 

1966년부터1969 년까지 150명이 넘는 제자들을 가리키고 1969년도 제자들이 일일이 써준 감사편지와 사진을 들고 귀국 했던 최동호씨 언제 가는 꼭 찾아 가서 만나 보겠다는 생각으로 39년세월을 보내다가 당시 써준 제자들의 감사 편지와 수 십장의 빚 바랜 사진을 들고 베트남 디안을 와보니 150명 제자 중에는 베트남 남부장교로 근무하다 총살당한 제자도 있고 파이롯트로 근무하다 디안 지역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제자도 나를 반겨주고 1975년 해방 당시 미국으로 피신하여 지금은 성공하여 살고 있는 여려 명의 제자들 단발머리 여자제자는 디안 중학교 교장선생님 되어 성공하여 나를 반겨주고 당시에도 코메디 처럼 웃음을 주고 태권도도 무척 잘하던 제자는 디안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어 달려와서 거수경례로 반겨주고 얌전하기만 하던 이쁜 여자 제자는 디안 지역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선생님이 오셨다고 연락을 받고 달려와 선생님을 눈물을 흘리고.. 기관사로 근무.하고.있는.제자도.있고 수많은 태권도 제자들이 39년전 선생님이 왔다는 연락을 받고 모여 들고 있다

   

1969년당시 채명신 장군 주월사령관이 최동호씨 제자들에게 주었던 태권도 단증.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 하고 있는 제자들이 고맙기만 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제자들한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는 최동호씨 전화를 받고 나서야 39년전에사용하던 베트남 말이 한마디씩 기억나는지 어설푼 베트남 말이 뛰어나오기 시작한다

한명 한명 HAI(하이) 제자들과 만나면서 옛날사진으로 확인 하고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최동호씨 위 제자는 (HAI 하이)

당시 제자 사진 지금은 베트남 유명 우유 회사 사장으로 제직 중인 (hai 하이)

당시 코메디 같이 웃기던 제자는 디안 고등하교 교장 선생님 되어  한 걸음에 달려 와서 태권도 선생님을 반겨주고 (위사진은 디안교등학교 교장(phe 페)

어릴 적 최동호 선생님이 가져 온 사진을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당시 디안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던 홍생씨 는  미국에서 살고 있고

당시 5살짜리 꼬마는 40대로 변하여 최동호씨 가 왔다고 옛날 꼬마사진을 바라보고 있고(사진이름 LE 레)

당시 너무 이뻐서 태권도 도복을 만들어 입혀주고 태권도 도장으로 대리고 다니던  꼬마 지금은 40대초반으로 변해서 선생님을 반겨주고 있다

당시 디안 중학교 태권도부 제자들 모습

베트남 남부군 파이롯트로 근무하다 지금은 가구 도매상을 하고 있는 제자 (KY 키)

당시에 비둘기 부대는 베트남 철도 제작창으로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 39년만에 뵙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디안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제자들이 초청으로 디안에서 가장 큰 식당에서 점심 겸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얌전하기만 하던 단발 머리 여자 제자는 백발이 햐얀 할머니가 되어서 선생님을 맞아 주고 있다

소식을 듣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식당으로 모여든 태권도 제자들

디안 중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여자제자 (NGA 야)

당시 디안 중학교 여자제자 사진 (현재 디안 중학교 교감 선생님)

또 한제자가 찿아 와서 선생님을 부둥켜안고 즐거워 하고 있다

선생님과 제자들이 40년만에 불러본  아리랑 아직도 잊지 않고 한국의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마이는 현제 디안 지역에서 호텔 운영 하고 있다 당시에도 복스럽고 얌전 했다고 한다 (BAY바이)

늦게 도착한 여 자제자는 호텔사장으로 성공 하여 옛날 사진을 보고 있다

제자들이 급히 마련한 금반지 두 돈 과 선물을 선생님에게 전달하고 있다

                   함께 모인 제자들과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여자 제자 들과 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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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비둘기 부대 최동호씨 태권도제자들(1)  

최동호(69)씨는 1966년 태권도 교관 단 당시 하사로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다 비둘기부대에 배속된 최동호씨는 비둘기부대가 주둔한 디안 지역 디안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3년동안 한국의 태권도를 전수시키고 1969년 한국으로 귀국했다. 최동호씨는 귀국하고서도 3년동안 가리키던 제자들과 편지 연락을 주고 받다가 1975년 4월30베트남이 북으로 통일되면서 베트남 제자들과 연락이 두절 되면서 최동호씨는 항시 베트남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39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된다

2008년10월 최동호씨는 베트남에 제자들을 찾아 볼 생각으로 당시 제자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들고 무작정 호치민 으로 날아온다 당시에 유창하게 통하던 베트남 말은 한 마디도 기억 나지 않고 해서

베트남 호치민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남원 전우의 소개로 미스 쫍양을 소개받고 미스쫍의 통역으로 비둘기부대가 주둔했던 디안 지역으로 출발했다 39년이란 세월이 지난 디안 지역은 호치민시와 맞 붙은 거대한 도시와 공장지역으로 변해서 39년전 기억으로는 어디가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고 미스쫍(26세)양의 도움으로 몇 시간을 디안 지역을 헤메 다가  어느 중년 여자분이 길거리에서  최동호씨를 알아보고 미스타최 하면서 자신이 야이사이공 입니다 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아버지 집에서 같이 살던 최동호씨 아니신가요? 라고 베트남말로 급하게 말하고 있다

최동호씨와 미스쫍이 디안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39년전에 찍은 사진을 들고 수소문하고 있다 

나이 많은 할머니께서 39년전 사연을 알듯한 말을 하고 있다 드디어 최동호씨 얼굴이 환하게 변하고 통역하던 미스쫍 얼굴도 미소가 번진다

길거리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수소문도중 미스타 최 라고 한국말이 들려온다

제가 야이사이공 입니다 당시꼬마여자였던 야이사이공 이여요 베트남말과 한국말이 급하게 흘러나온다(야이 사이공 꼬마 여자 아가씨란뜻) 나를 무척이나 이뻐 해 주셨어요. 우리아버지 집에서 미스타 최가 살았습니다 깜짝 놀란 모습의 최동호씨 당시 5-6세정도 되었을 꼬마가 최동호씨 알아 보다니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찿는다고 했던가.. 이런 모습이 그 말과 해당되지 않을런지 이뻐해 주던 꼬마 여자 어린애가 생각난다. 그러나 당시에 5-6세정도 여자어린이가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니 너무 신기하다 

옛날 태권도 제자들 사진과 오래 된 사진을 보여주니 같이 가지고 한다.여자를 따라 가보자 이곳 디안에서 지내면서 아들처럼 사랑해 주시던 베트남 어른의 막내딸이라고 하니

이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나이 많은 디안 지역 할머니 안내로 또 다른 지역으로 안내되고

이 곳이 야이사이공 집이다 당시 5-6세되었던 여자는 어느덧 중년부인으로 변하고 3명의 자녀를 둔 가정주부가 되어있다

69년까지 낮이면 디안 중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리키고 밤이면 디안 시장옆 가정집에서 생활했던 그 집을 찾아야 한다 항시 아들처럼 대해주시고 인자하신 아버님 어머님 같으신 그 어르신들을 만나야 한다 지금도 살아계실까? 그 어른의 집 대문을 들어서고 있는 최동호씨(당시 비둘기부대 하사)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누군가 총알처럼 맨말로 마당으로 달려나와 최동호 씨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39년이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최동호씨를 금방 알아보고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나온 이사람 66년부터 69년까지 같은 집에서 지내던 제자이고 나를 사랑해 주셨던 어르신의 큰아들 THINH(턴)이다

선생님 왜 이제오셨습니까? 얼마나 찿아는대…. 대구에 선생님집 주소로 수많이 편지도 했는데 받지 않으셨나요?

연락이 되지 않아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경북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한 관계로 베트남 제자들과 최동호씨는 영영 소식이 끈어 지고  미안하고 죄송하다 일찍 찿아 왔어야 했는데 지금에야 찿아와서 미안하다

1969년도 당시 위의 제자 THINH(턴) 모습

아버님과 어머님은 사망하셨습니다 생전에 미스타 최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했습니다2층에 영전이 모셔져 있습니다

당시에 자식처럼 사랑해 주시던 어르신(생전모습)

영전 앞에서 눈물로 큰절을 올리고 있는 최동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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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부대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2011년1월 촬영 

 

비둘기부대로 참전하신 김영회 전우부부께서 37년만에 비둘기 부대를 방문

베트남 회사경비들 제지로 연병장 및 막사를 둘러보지 못하였다.

옛날 참전했던 지역은 변함없이 그대로남아있다

비둘기 부대 있던 곳을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다

1970년도 김영회전우 막사 앞에서

   

비둘기부대 정문앞

비둘기 부대와 같이 있던 철도청 연병장

파월5주년 기념 행사도 이곳 연병장에서 했다고 한다

베트남정부 관리로 안으로 들어 갈수가 없다

김영회 전우가 옛날 모습을 보기 위해 담장 너머로 연병장 지역을 보고 있다

비둘기 부대 정문 안도로 에서

현제 비둘기 부대 정문 앞

1970년도 비둘기부대 정문 앞

비둘기 부대 안 도로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일부건물도 그대로 사용되고있다

비둘기부대 후문 쪽은 베트남 민가로  가득 차 있다

비둘기 부대 후문.. 굳게 닫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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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비둘기 부대 정문 모습

 

건설지원단은 사이공 인근 기안(Dian)에서 각종 민사심리전을 수행하여 민심을 획득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창설 및 파병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파병된 연합군의 민사심리전 경쟁터였다. 건설지원단이 주둔했던 디안 지역은 남베트남군 제3군단 관할 지역으 로 캄보디아 국경으로부터 빈호아와 디안을 거쳐 사이공 남단에 이르는 호치민 루트로 연결되는 베트콩의 핵심 루트인 ‘D지역’ 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미군, 태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등이 10개 성(省)을 대상으로 연합 심리전을 전개했는데 비둘기 부대의 민사심리전이 으뜸이었다.

건설지원단은 1965년 파병 당시에는 한국군 군사원조단으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01경비대대, 해병 제1독립 공병중대 등으로 편성했으며,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고 파병과 동시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통합 지휘했다. 이후 전투부대의 파병과 함께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건설지원단으로 개편하여 ‘일면 작전, 일면 건설’로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 댐과 도로, 병원과 학교 등 건설 지원을 통해 남베트남 정부의 평정 사업 달성에 기여했다. 한국군의 건설사업은 민사작전과 연계하여 전투의 승리로 이끌어가는 첩경이었으며, 지역 사회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에게 각종기술을 습득시켜 자립 능력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인력을 개발하여 베트남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1968년 비둘기 부대의 영내에 설치된 ‘비둘기 기술학교’는 베트남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발전기 및 엔진 전문교육을 실시했으며, 양재학원은 재봉·자수교육 과정을 운용했다. 그 외에도 비둘기 부대는 농토개간을 비롯하여 수리시설 개선과 함께 농기구 등을 기증하여 농산물의 증산에 기여를 했다.

적 상황

  • 1. 건설지원단이 주둔하고 있는 디안 군과 그 인접군인 투득-하티엔 일대에는 VC 제165연대 예하인 제2, 제3대대가 출몰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2개 박격 포 중대와 1개 특수행동부대를 포함한 4개 중대로 편성되어, 남베트남서부 고원지대에 거점을 둔 북베트남군 제7사단 및 VC 제9사단(제 271, 272, 273연대)과 제84포병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역 내 남베트남정부기관과 1번 및 13번 공로상의 철교 및 교량, 보급품 수송차량, 지역 내 연합군 군사 시설 등을 파괴하고 민심을 교란할 목적으로 계속 부단히 기습공격을 감행 하였다.
  • 2. 편제장비는 122 mm RKT, B-40 적탄통, M-79 유탄발사기, 중화기부대는 82mm 와 60mm 박격포로 무장 1970. 7월 이후 : 적은 탕로이 대대, N-10 특공(Sapper)대대, N-15 특공 대대 등 3개 대대로서 지방군 약 200명, VC 약 73명으로 판단

주요 작전

  • 1. 대사관 경계 : 1965. 4. 15, 해병 제1독립공병중대에서 1개 분대
  • 2. 경계 작전, 건설지원, 의료지원 : 각 부대별 활동 참조

인접부대와의 작전 협조

  • 1. 미 제1보병사단 제2여단 1개대대 : 사단사령부 주둔지 일대에서 단과 협조 하며, Binh Dung(XT 8588) 일대에서 매복 및 탐색정찰 활동

    - 66. 5. 13-14 : 미 제1사단 APC 2대와 M46 탱크 2대 지원

  • 2. 디안, 라티우 군 주둔 지방군 제58민병대대 2개 중대(제874, 498중대) :지역 내 중요공사시설, 전략촌, 철도보호 등 경계 작전
  • 3. 남베트남 정규군은 투득의 해병 제3대대 및 공수 제3대대, 민병 제53대대 : 주야간 매복 및 탐색작전
  • 4. 디안 동쪽 5km 지점에 미 제2야전군사령부
  • 5. 디안군 지방군 제874, 488중대, 제42중대

    ※ 상호 작전 협조 결여로 남베트남 경찰대로부터 오인사격 피해 : 1967. 9. 15,제3중대 매복조 14명 중 전사 2명, 부상 3명

자조 지원

베트남인들에게 각종기술을 습득시켜 자립 능력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인력을 개발하여 베트남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비둘기 부대의 영내에 설치된 ‘비둘기 기술학교’는 베트남 정부의 정식인가(1968. 4. 30)를 받아 발전기 및 엔진 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양재학원은 재봉·재단·자수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타자학원도 3개월 과정으로 운용하였다. 그 외에도 비둘기 부대는 농토개간을 비롯하여 수리시설 개선과 함께 농기구 등을 기증하여 농산물의 증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부대가 주둔하는 곳마다 오랫동안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병원·학교·성당·불당·양로원·고아원 등과 같은 공공시설을 증·개축하거나, 새로 지어주어 마을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한국군은 “베트남 주민들의 참된 벗이 되자”는 기치아래 중대단위로 인근지역의 마을 및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후, 매일 자매마을과 학교를 순회하며, 이발을 해주고 각종행사 참석은 물론 환자의 위문과 농경을 지원하면서 베트남인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 1. 양재학원 : 양재기술, 6개월
  • 2. 타자학원 : 영문, 베트남어 타자, 6개월
  • 3. 비둘기 기술학교 : 자동차, 발전기 교육, 7개월

민사 심리전

  • 1. 방송 및 전단살포
  • 2. 친선활동


 

비둘기부대 (건설 지원단)

The Construction Support Group


한국군 부대로써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건설 지원단은 국방부 명령(육)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8명으로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였으며(초대단장 조문환 준장) 예하 부대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이동 경비대대,제8이송중대, 해병 제1독립 공병 중대를 핵심으로 부대편성을 하였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으며,  2월13일 파월 제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에 월남 사이공 도착하고,3월 16일에는 전부대가 숙영지 도착과 동시에 불명확한 적정과 지형조건하에 자체 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하였으며, 파월이래 처음으로 베트콩의 기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월 초창기의 여려운 환경속에서 건설 지원단은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학교, 진료소 공사와태권도 지도 및 심리전 활동등 한국군의 개척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공부할 교실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담한 교실을 지어 주었다.전쟁의 초연 속에 맥 풀린 어린 동심에 꿈을 심어 주었고 이곳 '디안'의면모는 비둘기들이 월남에 날아온 이후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좁은 시골길이 대로로 바뀌어 훤히 트이고 먼지 투성이 도로가 다듬어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비둘기부대의 노고에 따뜻한 월남 사람들의 인정어린 보답이 뒤따랐다.비둘기부대 병영 앞에 '디안'의 마을 사람들이 정장한 수녀들을 앞세우고 정문 가까이 다가오는 시위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선의의 시위였던 것이다.

 또한 펀펀한 황무지에서 소를 모는 목녀가 그들 허리에 찬 소중한 물통을  한국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름 아  닌 인정의 교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깜은 꼬', 깜은 비둘기 '비둘기  고마워요'라는 이 월남말은 한국의 장병들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월남인  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비둘기의  주변에도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철저한 경비태세로 전투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둘레에 철조망과 지뢰지대  를 구축하여5중방위선을 펴고 요새화된 자체경비로 장병들은 안전도를  높혀가고 있었다



                            40여년전의 비둘기 부대 모습


큰 지도에서 월남전 한국군 주둔지 및 작전지역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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