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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29 전쟁의 기억으로 쓰는 평화이야기(베트남전쟁 다시보기)
  2. 2014.08.26 월남전스토리
  3. 2013.10.08 청룡 5대대 호이안(1968년도 주둔지역)
  4. 2013.10.02 청룡 부대현황
  5. 2013.10.02 백마 부대현황

1968년 청룡 25중대가 주둔 했던 지역(호이안)  

1968년 5월3일 청룡 25중대는 월맹 군 정규군으로 부터 중대본부 전채가 공격을 받는다5월3일전투에서 방기호 중대장은 포탄으로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긴급 후송 되고 소대장 및 해병6명이 전사 했다.  당시에 전투에 참전 했던 해병 중대장과 병사들은 지금도 매월 만나서 전우애를 나눈다고 한다

당시에 2차선 따이한 로는 왕복6차선으로 오행산 입구까지 시원스럽게 뚤려 있다 

 

당시25중대가 주둔했던 지역은 이곳에 대형 공단지역으로 변했다

 

공단으로 변한  25중대지역을  2일동안 찿앗으나 찿지 못하고3일째되는날 이 지역 부면장님의 안내로 공장지역으로 변한 25중대지역을찿을 수 있었다 부면장님(상이군인)께서 25중대지역을 안내하고 무었인가 열심히 글을쓰고있다

 

 

방기호 중대장님께서 당시 중대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안이기 해병조카가 한국에서 가져 온  술과 과일을 차리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안이기 조카 안영진씨가 25중대까지 찿아 와서 삼촌에 명복을 빌고 있다 

 

 

안이기 해병은 5월3일 전투에서 기적 같이 살아났으나 5월4일 전투에서 전사했다42년만에 이곳에 찿아 와서 돌아오지 못한 해병전우 안이기 전우에게 명복을 빌면서 발거름을 돌리는 해병전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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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청룡 상륙주둔지:1965.10.9~1965.12.25)
큰 지도에서 월남전 한국군 주둔지 및 작전지역 보기

                                       지도(청룡 1차주둔지:1965.12.6~1966.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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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청룡 2차주둔지:1966.9.19~196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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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청룡 3차주둔지:1968.1.7~197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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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주둔지역

1965년 10월 9일 아침 베트남 중남부 깜란항에 첫 발을 내딛었던 해병대 청룡부대(제2여단)는 즉각 항구 일대의 평정작전에 돌입했다. 이어 그해 12월 말 미군의 요청에 따라 남베트남의 곡창지대 뚜이호아 평야지대를 평정했다. 그리고 1966년 8월 세 번째의 주둔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 곳이 바로 짜빈동전투가 수행됐던 쭈라이(Chu Lai)지역이었다. 남베트남 제1군단의 책임지역이다. 이어 1967년 12월 네 번째로 호이안(Hoi An)에 진출해 1972년 철수할 때까지 주둔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의 쭈라이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베트콩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군사분계선과 근접해 있어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도 용이했다. 따라서 그 곳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언제, 어느 곳이라도 청룡부대의 기지를 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해병대의 주둔지역

④ 비룡작전(67.12.22 ~ 68.1.29)
  • - 미군의 케산전투 병력공백 보안
  • - 호이안시 전투(68.4.30 ~ 2.7)
  • - 베리아 상륙작전(69.9.5 ~ 9.28)
③ 북극성 작전(66.8.16 ~ 9.23)
  • - 미 해병 제3상륙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한 작전지역 이동
  • - 짜빈동 전투(67.2.14 ~ 15)
② 청룡1호 작전(65.12.16 ~ 66.1.16)
  • - 빈딘성 뚜이호아로 이동
  • - 한국군 최초의 연대급 작전
  • - 곡창지대, 1번 도로 개통
① 깜란항 상륙(65.10.3 ~ 10.9)
  • - 최초 3개대대로 편성
  • - 제2대대 5중대 까두산전투(11.4)
  • - 판랑 비행장 감제고지 장악

해병대의 주요 전투

깜란지역(65.10. 3-12. 15)
  • ① 부산항 출항과 깜란항 상륙 : 1965. 10. 2일, 미 해군 수송선 ‘가이거’호와 ‘엘 틴저’호에 승선하여 10. 3일 부산항 제3부두를 출항했다. 10. 8일 캄란 만에 도착 한 후 10. 9일부터 14일까지 상륙을 완료했다. 최초 주둔지는 여단 본부 와 제2·3대대는 Thon Hoa Da 일대에(CP0222), 제1대대는 깜란 반도 Ao Ho 산 서측(CP 0715)에서 각종 보급 및 지원시설을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여단 주둔지는 차후 제9사단 30연대에게 인수하였다.
  • ② 까두산(Nui; 山 Ca Du) 작전 : 1965. 11. 4일, 제2대대 5중대는 캄란으로부터 남쪽으로 70km떨어진 판랑에서 부숑비행장 건설을 위협하는 까두산 일대의 적 을 공격하여 정상을 점령하였다.
뚜이호아지역(65.12. 15-66. 10. 9)
  • ① 뚜이호아 : 남베트남 중부의 요충지인 퓨연 성의 성도이면서 남베트남 3대 곡 창지대 중 하나로 중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의 식량 보급 기지 역할이었다.
  • ② 청룡 1호 작전(65. 12. 16∼66. 1. 16) : 제2대대가 뚜이호아 북쪽지역을 장악 한 후, 여단(-1)은 남쪽 및 서쪽을 장악하였다.
  • ③ 해풍작전(66. 7. 22∼8. 17) : 66. 8. 11일, 제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가 미테마을의 동굴진지 작전 수행시 적이 투척한 수류탄을 막고 산화하였다.
추라이지역(66. 8. 18-67. 12. 21)
  • ① 추라이 : 남베트남 제2의 도시인 다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지역
  • ② 강구작전(66. 1. 31-2. 3) : 제1대대 3중대 3소대가 바딴간 반도의 수로 탐색 작전시 적의 포위망을 탈출시 위생하사관이었던 지덕칠하사가 분대를 구출하고 본인은 전사(태극무공훈장 수여)
  • ③ 짜빈동 전투(67. 2. 14∼2. 15) : 짜빈동 전투 참조

    ※ 해병대 증파 : 1967. 7월, 제5대대

호이안지역(67. 12. 21-72. 1. 21)
  • ① 호이안 : 1967년 말 케산전투 준비를 위해 다낭 남쪽 지역의 방어태세 보강을 위해 이동(호이안을 중심으로 북쪽에 제1, 5대대, 남쪽에 제2, 3대대를 배치)
  • ② 괴룡작전(68. 1. 30-3. 13), 승룡 7-21호 작전(69. 1. 10-1. 21), 베리아 상륙 작전(69. 9.5-9. 30), 황룡 2호 작전(70. 4. 1-4. 15) 등

    ※ 철수 완료 : 1972. 2. 19

해병대의 전과

파병기간 6년 5개월 동안 여단급 작전 66회와 대대급 작전 109회를 비롯하여 소 부대 작전 15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등 혁혁한 전 과를 올렸다. 또한 8,810톤의 구호 활동 및 대민 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 지 원, 1,593동의 건설 지원, 450,064명의 친선 활동 등 대민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 써 3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하여 1회의 미 대통령과 남베트남 대통령의 표창 을 받았다. 그러나 청룡 부대 또한 전사자 1,156명, 부상자 2,702명의 손실이 있었다

 


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19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1965년 12월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해병 제2여단은 한국군 최초 전투부대로 파월된 다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대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파  월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사 령 관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참전기간 : 1965. 10. 9 - 1972. 2. 24

참전군인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희  생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전 투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 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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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사령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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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사령부 정문2013년9월3일 촬영


                                      2013년 9월 백마사령부 연병장 

제9사단은 남베트남 해안선을 따라 뚜이호아, 닌호아, 깜란 일대에서 많은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오작교 작전, 홍길동 작전, 백마 작전 등을 통해 작전지역 내 전장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개요

제9사단은 수도사단 및 제2해병여단에 이어 전투부대 파병 제2진으로, 제28연대 본대와 제29연대 선발대는 1966년 8월 30일 부산항 제3부두를 출발하여 1966년 9월 5일, 남베트남의 나짱(Nha Tranng)에 상륙하였다.

이후 사단은 뚜이호아(Tuy Hoa), 닌호아(Ninh Hoa), 나짱(Nha Trang), 깜란(Cam Ranh) 일대에 주둔하면서, 1973년 2월 철수할 때까지 475회의 대부대 작전과 다양한 형태의 소부대 전투를 통해 남베트남의 평정 작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1967년 3월 8일, 맹호부대와 함께 실시한 오작교 작전으로 남베트남의 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1번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백마1호 작전과 성마 72-1호 작전 등 10여 회에 걸친 사단급 작전으로 지역의 평정작전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한국군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파병 경과

정부는 1966년 2월 22일, 남베트남 정부의 수상 응웬까오끼(Nguyen Cao Ky) 소장으로부터 1개 전투사단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는 공한(公翰)을 접수하는 한편, 이날 방한한 험프리(Humphrey) 미 부통령으로부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정부는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의견과 남베트남 및 미국 정부의 요청을 검토한 결과 ‘전투부대의 증파 동의안(同意案)’을 마련하여 3월 2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여 동의(찬성 95, 반대 27, 기권 3)를 얻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육군본부 주관하에 전투부대 증파를 위한 일반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국방부 장관은 6월 1일 “제9사단을 파월부대로 지명하였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하였다. 한편 파월부대로 선정된 제9사단은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현 임무를 제32사단에 인계하고, 3월 20일부로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하여 파월 준비에 전념하도록 예하부대에 지시하였다.

이어서 부대이동을 완료한 제9사단은 파월을 위한 편제표에 따라 인원과 장비를 보충받는 한편 부대 개편작업과 교육훈련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 27일에는 중앙청 동측 광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주관하에 국민환송식 후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백마사단은 편성 1개월도 못된 1950년 11월23일부터 경북지구(영주, 김천, 문경)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51년 1월25일 연합군의 제2차 총 반격시는 제1군단 예하부대로서 괴뢰군 제10사단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여 적 사살 5,549명, 화기 노획 1,622정의 대 전과를 올렸으며, 그 후 철원지구 반격작전, 금화지구 방어작전, 사두봉 전투를 거쳐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정예부대인 제38군의 12차에 걸친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피아 공방전 끝에 적병 8,234명을 사살하고 백마고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 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 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 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 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 광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는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1966년 9월16일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년 9월22일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 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초대 이소동 사단장의 뒤를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를 맡았다. 파월기간중 478회 대부대 전투와 211.23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211,714회의 전투를 치루었다.
전투중에도 대민 봉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건설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대민사업을 지원했으며 1967년 1월29일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년 3월8일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 개통의 오작교 작전과 1967년 7월9일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 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 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도로 개통은 월남군과 연합군까지도 공격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 구역이였으나 1967년 3월8일부터 맹호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 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날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파     월 :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 인근지역인 닌호아에 주둔했다.

사 령 관  : 초대 이소동소장에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

참전기간 : 1966. 9. 22 - 1973. 3. 11

참전군인 :100,336명 (장교 6,445명, 사병 98,891명)이 참전

희    생 :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전     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개통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 도로를 완전 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대민사업 :

대민봉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광장 백마부대 결단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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