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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장의 베트남전쟁과 남겨진 이야기들...
비둘기 부대현황 본문
현재의 비둘기 부대 정문 모습
건설지원단은 사이공 인근 기안(Dian)에서 각종 민사심리전을 수행하여 민심을 획득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창설 및 파병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파병된 연합군의 민사심리전 경쟁터였다. 건설지원단이 주둔했던 디안 지역은 남베트남군 제3군단 관할 지역으 로 캄보디아 국경으로부터 빈호아와 디안을 거쳐 사이공 남단에 이르는 호치민 루트로 연결되는 베트콩의 핵심 루트인 ‘D지역’ 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미군, 태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등이 10개 성(省)을 대상으로 연합 심리전을 전개했는데 비둘기 부대의 민사심리전이 으뜸이었다.
건설지원단은 1965년 파병 당시에는 한국군 군사원조단으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01경비대대, 해병 제1독립 공병중대 등으로 편성했으며,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고 파병과 동시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통합 지휘했다. 이후 전투부대의 파병과 함께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건설지원단으로 개편하여 ‘일면 작전, 일면 건설’로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 댐과 도로, 병원과 학교 등 건설 지원을 통해 남베트남 정부의 평정 사업 달성에 기여했다. 한국군의 건설사업은 민사작전과 연계하여 전투의 승리로 이끌어가는 첩경이었으며, 지역 사회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에게 각종기술을 습득시켜 자립 능력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인력을 개발하여 베트남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1968년 비둘기 부대의 영내에 설치된 ‘비둘기 기술학교’는 베트남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발전기 및 엔진 전문교육을 실시했으며, 양재학원은 재봉·자수교육 과정을 운용했다. 그 외에도 비둘기 부대는 농토개간을 비롯하여 수리시설 개선과 함께 농기구 등을 기증하여 농산물의 증산에 기여를 했다.
적 상황
- 1. 건설지원단이 주둔하고 있는 디안 군과 그 인접군인 투득-하티엔 일대에는 VC 제165연대 예하인 제2, 제3대대가 출몰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2개 박격 포 중대와 1개 특수행동부대를 포함한 4개 중대로 편성되어, 남베트남서부 고원지대에 거점을 둔 북베트남군 제7사단 및 VC 제9사단(제 271, 272, 273연대)과 제84포병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역 내 남베트남정부기관과 1번 및 13번 공로상의 철교 및 교량, 보급품 수송차량, 지역 내 연합군 군사 시설 등을 파괴하고 민심을 교란할 목적으로 계속 부단히 기습공격을 감행 하였다.
- 2. 편제장비는 122 mm RKT, B-40 적탄통, M-79 유탄발사기, 중화기부대는 82mm 와 60mm 박격포로 무장 1970. 7월 이후 : 적은 탕로이 대대, N-10 특공(Sapper)대대, N-15 특공 대대 등 3개 대대로서 지방군 약 200명, VC 약 73명으로 판단
주요 작전
- 1. 대사관 경계 : 1965. 4. 15, 해병 제1독립공병중대에서 1개 분대
- 2. 경계 작전, 건설지원, 의료지원 : 각 부대별 활동 참조
인접부대와의 작전 협조
- 1. 미 제1보병사단 제2여단 1개대대 : 사단사령부 주둔지 일대에서 단과 협조 하며, Binh Dung(XT 8588) 일대에서 매복 및 탐색정찰 활동
- 66. 5. 13-14 : 미 제1사단 APC 2대와 M46 탱크 2대 지원
- 2. 디안, 라티우 군 주둔 지방군 제58민병대대 2개 중대(제874, 498중대) :지역 내 중요공사시설, 전략촌, 철도보호 등 경계 작전
- 3. 남베트남 정규군은 투득의 해병 제3대대 및 공수 제3대대, 민병 제53대대 : 주야간 매복 및 탐색작전
- 4. 디안 동쪽 5km 지점에 미 제2야전군사령부
- 5. 디안군 지방군 제874, 488중대, 제42중대
※ 상호 작전 협조 결여로 남베트남 경찰대로부터 오인사격 피해 : 1967. 9. 15,제3중대 매복조 14명 중 전사 2명, 부상 3명
자조 지원
베트남인들에게 각종기술을 습득시켜 자립 능력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인력을 개발하여 베트남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비둘기 부대의 영내에 설치된 ‘비둘기 기술학교’는 베트남 정부의 정식인가(1968. 4. 30)를 받아 발전기 및 엔진 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양재학원은 재봉·재단·자수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타자학원도 3개월 과정으로 운용하였다. 그 외에도 비둘기 부대는 농토개간을 비롯하여 수리시설 개선과 함께 농기구 등을 기증하여 농산물의 증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부대가 주둔하는 곳마다 오랫동안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병원·학교·성당·불당·양로원·고아원 등과 같은 공공시설을 증·개축하거나, 새로 지어주어 마을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한국군은 “베트남 주민들의 참된 벗이 되자”는 기치아래 중대단위로 인근지역의 마을 및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후, 매일 자매마을과 학교를 순회하며, 이발을 해주고 각종행사 참석은 물론 환자의 위문과 농경을 지원하면서 베트남인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 1. 양재학원 : 양재기술, 6개월
- 2. 타자학원 : 영문, 베트남어 타자, 6개월
- 3. 비둘기 기술학교 : 자동차, 발전기 교육, 7개월
민사 심리전
- 1. 방송 및 전단살포
- 2. 친선활동
비둘기부대 (건설 지원단)
The Construction Support Group
한국군 부대로써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건설 지원단은 국방부 명령(육)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8명으로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였으며(초대단장 조문환 준장) 예하 부대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이동 경비대대,제8이송중대, 해병 제1독립 공병 중대를 핵심으로 부대편성을 하였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으며, 2월13일 파월 제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에 월남 사이공 도착하고,3월 16일에는 전부대가 숙영지 도착과 동시에 불명확한 적정과 지형조건하에 자체 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하였으며, 파월이래 처음으로 베트콩의 기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월 초창기의 여려운 환경속에서 건설 지원단은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학교, 진료소 공사와태권도 지도 및 심리전 활동등 한국군의 개척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공부할 교실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담한 교실을 지어 주었다.전쟁의 초연 속에 맥 풀린 어린 동심에 꿈을 심어 주었고 이곳 '디안'의면모는 비둘기들이 월남에 날아온 이후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좁은 시골길이 대로로 바뀌어 훤히 트이고 먼지 투성이 도로가 다듬어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비둘기부대의 노고에 따뜻한 월남 사람들의 인정어린 보답이 뒤따랐다.비둘기부대 병영 앞에 '디안'의 마을 사람들이 정장한 수녀들을 앞세우고 정문 가까이 다가오는 시위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선의의 시위였던 것이다.
또한 펀펀한 황무지에서 소를 모는
목녀가 그들 허리에 찬 소중한 물통을 한국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름 아 닌 인정의 교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깜은 꼬', 깜은 비둘기 '비둘기 고마워요'라는 이 월남말은 한국의 장병들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월남인 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비둘기의 주변에도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철저한 경비태세로 전투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둘레에 철조망과 지뢰지대 를 구축하여5중방위선을 펴고 요새화된 자체경비로 장병들은 안전도를 높혀가고 있었다
40여년전의 비둘기 부대 모습
큰 지도에서 월남전 한국군 주둔지 및 작전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