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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CEO 고엽제 참상 알리려 56세에 카메라들다

고엽제 사진가 마틴 리

▲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고엽제 참상을 알리기 위해 56세에 카메라를 든 남자가 있다. 사진가 마틴 리(본명 이용하·63·계원예술대학교 객원교수). 유명 화학회사 대표이사로 잘나가던 그가 직장을 버리고 사진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 가족은 “한창 일할 나이에 왜 이래요?”라면서 뜯어말렸다.
   
   하지만 남자는 절박했다. 전쟁의 참상과 고엽제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인생의 의무라는 생각이 점점 확연해졌다. 베트남 막내 참전용사인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2006년, 남자는 고엽제로 병마에 시달리는 전우의 집을 방문한 후 실천에 옮겼다. 계원예술대학교 사진예술학과에 최고령으로 입학해 최고령으로 졸업한 후 일본 규슈산업대학원에서 사진학 석사를 수료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본격적으로 고엽제 참상을 찍기 시작했다.
   
   마틴 리는 2010년부터 3년간 고엽제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누볐다. 국내에서는 서울보훈병원을 찾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서는 고엽제 집중 살포지역인 사이공의 빈 프억(Binh phuoc), 쾅치(Quang Tri), 타이빈(Tai binh) 등 오지마을 곳곳을 누볐다. 베트남의 고엽제 환자 집중 수용병원도 찾았다. 스태프진 7명이 필요했다. 인건비와 촬영비, 교통비에다가 학자금까지 억대의 돈이 들었지만 전액 자비 부담했다. 그는 “이것은 내 인생의 의무”라고 거듭 강조했다. 3년 동안 5만여장을 찍었고 그중 200여장을 추려 사진집을 낼 예정이다. 가제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담북스). 2월 중순경 사진집 출간에 이어 3월 중 개인전도 계획 중이다. 일본 도쿄에서는 이 사진들로 여러 번 단체전을 가졌고 초대전도 했지만 국내에서는 한 번도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없다.
   
   그의 사진전 이름은 ‘3rd generation(제3세대)’이다. 현재 고엽제 환자는 3세대까지 이어졌는데,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고엽제의 주성분인 다이옥신은 강한 독극물이다. 잘 분해되지도 않고 용해되지도 않는 이 약품은 인체에 흡수된 후 10~20년의 잠복기를 거쳐 피부병, 각종 암, 신경계 손상, 기형을 유발한다.
   
   그의 사진집은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힘들었다. 서울보훈병원에 누워있는 고엽제 환자들은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앙상한 뼈에 온몸은 피부병으로 뒤덮였다. 베트남 고엽제 3세대 아이들의 사진은 더욱 참혹했다. 어떤 아이는 팔이 없고, 어떤 아이는 다리가 없었으며, 어떤 아이는 눈이 없었다. 온몸이 배배 꼬여 평생 평평한 바닥에서는 잠을 못 이룬다는 아이는 해먹에서만 잔다고 했다. 영화 ‘스크림’의 가면을 쓴 듯 흉측한 얼굴도 있었고, 아예 빛을 못 본 기형아들은 유리관 속에 조르르 놓여 있었다.
   
   “실상은 이보다 훨씬 비참했다. 고엽제 참상을 알리기 위해 사진을 시작했지만 나 역시 그 정도일 줄 몰랐다. 이들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기조차 미안했다.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들에겐 희망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뿐이었다. 돌봐줄 가족이 있어 집에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사정이 좀 낫다. 고엽제 환자 수용병원에 있는 아이들은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아이들은 미래가 없다. 사회에 진출할 수도 없고 사랑도 하면 안 된다. 다음 세대에 전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금지다.”
   
   마틴 리 역시 고엽제 환자다. 그는 1972년에 베트남에 파병됐다. 1973년에 종전됐으니 막내병사 격이다. 맹호사단 작전상황실에서 근무한 그는 그 유명한 ‘안케 패스 전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안케 패스 전투는 베트콩과의 최대 격전이자 파월 한국군에 최대 피해를 입힌 전투다. 이 전투는 영화 ‘위 워 솔저스’와 ‘안케의 영웅들’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이 전투가 남긴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의 아비규환을 잊을 수 없다. 작전상황실에서 무전을 받는데 아군들이 ‘물 달라’ ‘살려 달라’고 끝없이 외쳐댔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물은 비행기로 공수해야 하는데 비행기가 뜨면 폭격을 당하니까. 아군들은 시레이션(전투식량 꾸러미)의 용기에 오줌을 받아서 커피를 타 마셨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 하루에 포가 50개씩 떨어졌다. 병사끼리 가장 많이 한 말이 ‘내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의 환청에 아직도 시달린다고 했다. “살려 달라” “물 달라”는 전우들의 아우성이 귓전을 맴돈다고 했다. 꿈에서도 그는 종종 전우들의 외침을 듣는다. 그런 다음날이면 현충원에 들러 병사들의 묘역을 참배한다. 그러면 마음이 진정된다고 했다. 그는 “참전 전우 중에는 대낮에도 갑자기 ‘엎드려’ 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혼자서 구르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40여년이 지났지만 베트남전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그가 고엽제 사진을 통해 말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베트남 참전 용사들에게 ‘용병’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 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어머니는 나를 베트남전에 파병하시면서 한 번도 ‘돈 벌어오라’고 하신 적이 없다. 나 역시 돈 벌러 간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명령으로 군에 입대했고, 군의 명령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거다. 스물한 살 순박한 청춘을 나라를 위해 바칠 각오로 전쟁에 임한 거다. 개중에는 전사자들의 가족도 있고, 평생 불구가 된 전상병도 있다. 이 사람들에게 ‘용병’이란 말은 엄청난 상처다.”
   
   또 하나 “고엽제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를 바란다”고 했다. 내내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던 그는 이 부분에서 목청을 높였다.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는가. 왜 선두에 나서는 위정자들이 없는가. 베트남 참전 유공자는 학력 수준이 낮은 집단이다. 전쟁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관련 법안이 통과되려면 객관적인 데이터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참전 유공자들의 힘은 취약하다.” 그 역시 고졸 출신이다. 공부에 대한 한이 남아 1980년대에 뒤늦게 성균관대 무역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사진집을 미국에서 영문으로도 내고 싶어한다. “미국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 영웅에 대한 예우가 확실한 나라다. 베트남전은 미국군과 한국군이 함께 참전한 전투다. 1965~1973년까지 베트남전에 한국군도 참전했고, 현재에도 이런 아픔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그는 인터뷰 내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하지 않았다.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서운함은 있었으나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러워했다. 참전 유공자들에게 있어 국가를 험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해 본 참전유공자들은 뼛속 깊이 ‘애국심’이 각인돼 있는 듯했다.[End_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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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에서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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