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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장의 베트남전쟁과 남겨진 이야기들...
백마 부대현황 본문
큰 지도에서 월남전 한국군 주둔지 및 작전지역 보기
백마사령부 정문2013년9월3일 촬영
2013년 9월 백마사령부 연병장
제9사단은 남베트남 해안선을 따라 뚜이호아, 닌호아, 깜란 일대에서 많은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오작교 작전, 홍길동 작전, 백마 작전 등을 통해 작전지역 내 전장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개요
제9사단은 수도사단 및 제2해병여단에 이어 전투부대 파병 제2진으로, 제28연대 본대와 제29연대 선발대는 1966년 8월 30일 부산항 제3부두를 출발하여 1966년 9월 5일, 남베트남의 나짱(Nha Tranng)에 상륙하였다.
이후 사단은 뚜이호아(Tuy Hoa), 닌호아(Ninh Hoa), 나짱(Nha Trang), 깜란(Cam Ranh) 일대에 주둔하면서, 1973년 2월 철수할 때까지 475회의 대부대 작전과 다양한 형태의 소부대 전투를 통해 남베트남의 평정 작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1967년 3월 8일, 맹호부대와 함께 실시한 오작교 작전으로 남베트남의 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1번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백마1호 작전과 성마 72-1호 작전 등 10여 회에 걸친 사단급 작전으로 지역의 평정작전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한국군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파병 경과
정부는 1966년 2월 22일, 남베트남 정부의 수상 응웬까오끼(Nguyen Cao Ky) 소장으로부터 1개 전투사단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는 공한(公翰)을 접수하는 한편, 이날 방한한 험프리(Humphrey) 미 부통령으로부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정부는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의견과 남베트남 및 미국 정부의 요청을 검토한 결과 ‘전투부대의 증파 동의안(同意案)’을 마련하여 3월 2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여 동의(찬성 95, 반대 27, 기권 3)를 얻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육군본부 주관하에 전투부대 증파를 위한 일반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국방부 장관은 6월 1일 “제9사단을 파월부대로 지명하였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하였다. 한편 파월부대로 선정된 제9사단은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현 임무를 제32사단에 인계하고, 3월 20일부로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하여 파월 준비에 전념하도록 예하부대에 지시하였다.
이어서 부대이동을 완료한 제9사단은 파월을 위한 편제표에 따라 인원과 장비를 보충받는 한편 부대 개편작업과 교육훈련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 27일에는 중앙청 동측 광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주관하에 국민환송식 후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백마사단은 편성 1개월도 못된 1950년 11월23일부터 경북지구(영주, 김천, 문경)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51년 1월25일 연합군의 제2차 총 반격시는 제1군단 예하부대로서 괴뢰군 제10사단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여 적 사살 5,549명, 화기 노획 1,622정의 대 전과를 올렸으며, 그 후 철원지구 반격작전, 금화지구 방어작전, 사두봉 전투를 거쳐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정예부대인 제38군의 12차에 걸친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피아 공방전 끝에 적병 8,234명을 사살하고 백마고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 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 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 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 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 광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는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1966년 9월16일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년 9월22일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 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초대 이소동 사단장의 뒤를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를 맡았다. 파월기간중 478회 대부대 전투와 211.23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211,714회의 전투를 치루었다.
전투중에도 대민 봉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건설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대민사업을 지원했으며 1967년 1월29일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년 3월8일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 개통의 오작교 작전과 1967년 7월9일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 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 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도로 개통은 월남군과 연합군까지도 공격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 구역이였으나 1967년 3월8일부터 맹호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 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날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파 월 :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 인근지역인 닌호아에 주둔했다.
사 령 관 : 초대 이소동소장에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
참전기간 : 1966. 9. 22 - 1973. 3. 11
참전군인 :100,336명 (장교 6,445명, 사병 98,891명)이 참전
희 생 :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전 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개통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 도로를 완전 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대민사업 :
대민봉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광장 백마부대 결단식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