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 해병 아리랑.
1970년 2월 26일 ~ 포항역.
제 33제대 교대 병력의 어머니께서 부르신 노래는 간절한 ~ 간절한 아리랑 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살아서 돌아오라"
아리랑 ~ 아리랑 ~ 해병 아리랑.
멀어지는 부산 항 그곳의 어머니의 노래도 아리랑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치지말고 몸 성히만 돌아오라"
아리랑 ~ 아리랑 ~ 청룡 아리랑.
제 33제대 209기 박영준 선배님은 (특별 소대) ~ 대대장님 전선 시찰시에만 출동하는 안전한 보직을 뿌리치시고
베리아 중대 1 소대로 자원해 전선으로 달려 가셨다.
주월사에서 배워 온 ~ 지뢰 매설을 하며 지내던 차에 귀국 3개월을 남겨 놓고 모든 작전에서 열외되어 ~ 안전을 보장 받고 있었다.
"1970년 11월 18일 ~ !!
소대 본부 상황실을 지키던 박영준 상병은 1분대장으로 부터 실탄을 보급해 달라는 전통을 받았다.
갓 투입된 일등병 두명이 길을 나서는것이 불안해 귀국 3개월을 남겨 놓고 ~ 모든 작전에서 열외되어 있으시던 박영준 상병이 따라나섰다.
조심 스레 언덕을 넘던 일등병이
악,내다리 ~ 하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울렸고 중간에 가던 박 상병은 터지는 폭탄을 가슴으로 안았고 뒤 따라 오던 일등병은 두다리가 절단 되었다.
일등병들이 ~ 내다리 ~ 내 다리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박 상병은 ~ 베트콩들이 곧 쫒아 올테니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고 약속된 구조 신호를 허공에 쏘아댔다.
그때 ~ 베트콩들이 세명이 나타났다. 확인 사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 미군 헬기가 기적 처럼 나타났다. 베트콩들은 확인 사살을 미쳐 못하고 도망갔다.
생과 사의 긴박한 찰나가 뜨겁게 지나가고 소대장님이 지원 병력을 끌고 와서
판쵸를 피더니 ~ 잘려나간 일등병의 다리를 싸고 있었다.
그때 ~ 박상병은 자신의 내장이 밖으로 나와 있음을 알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소대 본부 벙커가 있었던 근처는 낚시터가 되어있다)
다낭항에 정박 중이던 미 의료함에서 긴급 처치를 하고 필리핀 미군 기지 병원으로 옮겨진
박영준 선배님은 ~ 조국에서 죽게 해달라고 매일 떼를 쓰셨다.
사지 멀쩡히 부산항을 떠났던 ~ 박 선배님은 찬 바람 쌩썡 부는 김포 공항에 들것에 실려 내리셨다.
조국은 ~ 무슨 무슨 준비가 덜 되었다고 차가운 활주로에 30분을 누워있게 하였다.
대방동 해군 병원에서 길고 긴 투병 생활을 하던 중에 전선에서 같이 있던 213기 후배께서 찾아오셨다.
-- 박 선배님이 살아있을것 같아 -- 박 선배님이 만들어 놓고 ~ 미쳐 가져오지 못한 것 중에 -- 앨범 2권을 혹시나 하여 가지고 귀국 하였다.
그 앨범 마지막 장에 이렇게 씌여있다.
"나, 청룡은 자유의 월남인이 안정되고 평화롭게 살수 있게 하기 위해서 조국과 민족이 명을 받들어 나의 최선을 다 했다고 ~ 자부 한다.
그 앨범 마지막 장에 그렇게 씌여있었다.
(합천의 171기 불도자 선배님과 우측의 베리아 선배님)
해병 209기 박영준.
그 분은 ~ 이제 이름을 잊고 사신다.
그날 ~ 베리아 전선 ~ 그 능선에서 ~ 창자를 토해 놓고 베트콩의 확인 사살을 기달릴때 ~ 박영준은 이미 죽었다고 하신다.
지금은 ~ 베리아 ~라 ~ 불러 달라고 하신다.
해병 209기 ~ 그 선배님의 이름은 ~
그래서 "베리아 ~ 그래서 ~ 베리아 선배님 이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