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왜 11중대를 기습 공격해야만 했는가?
청룡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추라이 지역에서
적의 주요 공격 표적은 추라이 비행장과 ~ 청룡 포병 대대의 포진지였다.
포진지에 접근 하려면 우선 짜빈동 마을에 위치한 11중대를 필히 공격해야만 했다.
따라서 후에 밝혀진 것이지만 월맹군 1개 연대는 단 1시간만에 간단히 청룡11중대를 해치우고
청룡 포병 대대를 기습한후 추라이 미 공군기지를 공략코져 했던 것이다.
그러나 4시간에 걸친 청룡용사들의 혈투로 적은 지리 멸렬 후퇴하고 말았다.
만약 11중대가 적에의해 섬멸 되었더라면 한.미.월군은 적의 본격적인 대공세로 ~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11중대의 중대전술기지는 추라이 남쪽 쾅나이성 손틴군 짜빈동 마을 북쪽의 약 30m 높이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대의 동쪽 1km 지점에는 한국군이 전력을 다해 방어하던 베트남 제1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중대의 북쪽 6km 지점에서 청룡부대 여단본부가 있었다. 11중대 기지가 위치한 지역은 당시 해병 청룡부대 주둔 지역의 서남쪽 모퉁이였다"
11중대의 기지는 남북으로는 300m이고 동서로는 200m 정도인 길쭉하게 찌그러진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남쪽과 북쪽에는 약간 높이 솟은 지형이 있었는데 이곳에 관측소를 설치하였다.
기지 중앙이 높이가 낮았으므로 중대 중심부에선 북쪽과 남쪽의 상황을 완전하게 파악할수 없었다.
이 기지 외곽에는 2중의 단선철조망과 5중의 원형철조망이 있었다. 대인지뢰는 140발, 크레모아 63발, 조명지뢰 38발이 매설되어 있었다.
진지와 진지, 소대와 중대 사이에는 모두 교통호를 만들어 기지 내부의 교통호는 전체 길이가 800m에 달했다.
개인호의 절반 정도는 포탄에 견딜 수 있도록 유개호로 만들었으며 각 분대에 2개씩의 위장 진지를 만들어 적의 화력이 분산되도록 했다.
중대에는 중대 직할 병력 외에도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와 81밀리 박격포반 진지도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포병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포병 관측 장교인 김세창 중위도 기지 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운명의 날인 1966년 2월14일 밤이 되었다. 3일만 더 버티면 한국 해병대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되는 상태였다.
적들의 움직임이 수상했지만 기껏해야 2개 대대급 공격쯤으로 예상했을 뿐
설마 월맹 정규군 연대급을 초과하는 병력이 중대전술기지에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짜빈동 입구의 영웅 묘지말고도 현장에 사당이 지어져있다)
"2월14일 밤 11시20분. 거센 비바람 속에서 3소대 박기창 일병은 수풀을 헤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적이 철조망 파괴통으로 외곽 단선 철조망의 일부를 파괴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청음초는 즉각 중대로 적 발견을 보고했고,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탄을 발사하여 30여명의 적을 확인했다.
기지 서북쪽을 담당하고 있던 11중대 3소대는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은 1명의 시체를 남긴 체 금방 후퇴해 버렸다.
그런데 적은 그냥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떠들썩하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후퇴했다.
이와 동시에 기지 남쪽의 짜빈동 마을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적의 이상한 행동으로 보아 완전 철수한 것이 아니고 다시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전 병력에게 군화를 벗지 못하게 지시하고,
1/2병력을 진지에 배치한 상태로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적은 다음날 새벽이 다되도록 공격해 오지 않았다.
초긴장 상태로 참호 속에 대기하던 병사들도 하나둘 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2월15일 새벽 4시10분, 3소대 청음초였던 도성룡 일병과 조정남 일병은 베트남 사람 특유의 고약한 체취를 느꼈다.
거의 동시에 잠에서 갑자기 깬 이중석 일병은 적을 보고 놀라서 소총을 발사해버렸다.
해병대는 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의 유도아래 즉각 105밀리 포대에서 조명탄을 발사하고, 기지 외곽의 적 부대 후속지점으로 차단사격을 실시했다.
적들은 4시20분부터 이곳저곳에서 철조망 파괴통을 이용하여 3소대 외곽의 철조망을 파괴했다.
이윽고 적의 박격포 지원사격이 끝났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적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면서 3소대 진지로 돌격해 왔다.
11중대 병사들은 소총으로 최후 저지사격을 펼쳤다. 그러나 3소대 전방으로 돌격하던 적은 무려 2개 대대 병력이었다.
결국 4시40분 무렵 11중대 3소대 1분대와 3소대 화기분대가 방어하던 기지 외곽이 적 2개 대대 병력에 의해 돌파를 당했다.
애당초 3소대 1분대 지역은 방어정면이 너무 넓어 3소대장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11중대장에게 방어정면을 좁혀주도록 요청했으나 중대장이 묵살한 바 있었다.
결국 3소대 1분대의 방어망이 뚫려 중대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1중대 3소대 1분대장 배장춘 하사는 총과 무전기를 버리고 곡괭이를 집어 들고 백병전에 뛰어들었다.
1분대 이학현 상병은 적병 5명이 참호로 돌입한 후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중대 대변 수집통으로 빠져 버리자 대변 수집통에 수류탄을 던져 적 5명을 대변통 속에서 폭사시켰다.
이학현 상병은 배장춘 하사에게 달려드는 적을 죽인 후 오른쪽 발목과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개인호에 뛰어든 적병과 싸우던 조정남 일병은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부상 속에서도 계속 사격하던 이학현 상병도 개인호 속으로 적이 뛰어들자 수류탄을 터뜨려 적들과 함께 자폭해 버렸다.
김명덕 일병은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상태에서 수류탄을 모아 적들에게 계속 투척했다.
이영복 일병은 부상당한 배장춘 하사를 부축하여 2소대 진지로 후퇴했다. 이영복 일병을 제외하면 나머지 1분대원 전원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전사 5명, 부상 5명)
(짜빈동 전선의 울산 권용학 선배님)
"같은 시간은 3소대 화기분대도 돌파를 당했다.
사수 김낙성(김남석) 상병이 전사한 후에는 ~ 부사수 이내수 일병이, 그 다음에는 1번 탄약수 오태준 일병, 마지막으로 송영섭 일병이 경기관총을 넘겨받아 최후까지 사격했으나 결국 화기분대도 돌파당하고 말았다.
송영섭 일병은 마지막 순간 기관총 총열을 뽑아 물구덩이로 집어던지고 전사했다.
11중대에 배속된 1중대 3소대 소속 병력들도 철조망용 철주를 뽑아들고 백병전으로 적을 상대했다.
11중대 3소대 외곽 방어망을 돌파한 적들은 화염방사기 3문을 앞세우고 내곽방어망으로 안쪽으로 돌진해 왔다"
(츄라이 전선의 154기 남상순 선배님)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3소대에게 기지 외곽방어망을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어차피 방어가 뚫린 상태에서 현 위치에서 무리하게 방어를 펴기보다는 병력을 집결한 후 집중 반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모험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결단이 기지 방어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적들은 해병 청룡부대와 유사한 철모와 위장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진지 안에서 병력이 뒤섞이자 피아를 구별할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적은 평소 한국군이 기지 밖에서 매복작전을 할 때 수풀로 위장한 것을 보고 한국군을 흉내 내기 위해 수풀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고심하던 정경진 대위는 적이 수풀로 위장한 것을 인식하고 풀이나 나뭇가지를 꽂은 병사는 적이니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한국군은 기지 내에서는 수풀 위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0여년이 흘렀건만 ~ 아직도 풀한 포기 나지않는 곳이 있다)
"11중대 1소대가 위치한 지역에는 적 1개 대대가 공격해 왔다.
이곳의 적 1개 대대는 직접 방어망을 돌파하는 것이 임무라기보다는 11중대 3소대 지역으로 1소대가 지원을 못하게 견제공격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대대 vs 소대 간의 병력 차이가 컸으므로 1소대의 외곽방어망 중의 한곳도 결국 뚫리게 되었다.
적은 철조망 파괴통을 이용하여 1소대의 철조망을 7m 정도 파괴하였다. 3소대가 외곽방어망을 포기하고 후퇴할 무렵 1소대도 진지 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부대 건물)
"이미 3소대의 외곽방어망이 완전 뚫린 상태였기 때문에 1소대 방어망도 돌파당하면 중대는 전멸할 위험이 있었다.
11중대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11중대 1소대 2분대장 이준재 하사와 함께 화염방사기를 든 적병을 직접 공격하여 화염방사기 3문(혹은 2문)을 노획하였다.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적이 1소대 진지 중에 한곳만 돌파했음을 알고 조명탄이 터지는 순간에는 1발식 정조준 사격을 하도록 하고,
조명이 끊기는 순간에는 일제 사격을 돌파구에 집중시켰다.
"적이 11중대 1소대 방어망을 완전 돌파하지 못하고 공세가 주춤해진 새벽 6시 무렵,
1소대 병사들은 전방 100m 지점의 바위 뒤에 적병들이 대전차포와 척탄통으로 사격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1소대는 적의 대전차포를 공격하기 위해 수류탄으로 무장한 임시 특공조를 편성했다.
1소대 선임하사관 김용길 중사와 이진 병장, 통신병 조용구 상병은 수류탄 2발식을 들고 진지 밖으로 나가 포복으로 바위에 접근하였다.
김용길 중사 등 3명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들을 폭사시키고 대전차포 3문을 노획하였다.
결국 적은 공용화기를 많이 상실하여 11중대 1소대 지역을 완전히 돌파하지는 못했다"
(짜빈동의 흙 한줌 소중히 퍼 담는 ~ 後 靑龍 -- 해병혼)
"수세에 몰려 방어전을 펼치던 한국군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육탄돌격을 감행하자 진지 내부로 침투한 월맹 정규군들은 돌파구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7시20분 무렵 1,2 소대 혼성 병력이 3소대의 돌파구를 완전 차단하자 기지 내부에 침투한 적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11중대 병사들은 로켓발사기와 수류탄을 동원하여 잔존한 적들을 완전히 폭사시켜버렸다.
날이 밝아오자 미 해병대 소속 AC-47 4대가 출격하여 기지 밖의 적들을 맹폭하였다.
전투가 끝날 무렵 청룡부대 소속 O-1 관측기가 중대기지 상공에 나타나 날개를 흔들며 11중대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이윽고 청룡부대 2대대 6중대 소속 지원 병력이 헬기에 탑승하여 기지로 이동해 왔다.
마침내 혈전이 끝난 것이다.
적 시체 확인 246명, 추정 사살 60명, 포로가 2명이었다. 노획품은 대전차포 6문(혹은 3문), 기관총 2정, 기관단총 6정, AK-47 자동소총 17정, 소총 12정이었다.
아군 전사자는 전사 15명, 부상 33명이었고 전사자의 대부분은 3소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짜빈동의 신화를 이룩한 정경진 11중대장을 격려하는 주월 한,미 해병 수뇌부)
""작전이 끝난 다음날인 1967년 2월16일에는 월남군 최고 사령부 참모부장과 주월 한국군사령부 작전 참모가 부대를 방문했고,
17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해병대 사령관 출신의 '김성은' 국방부장관, '신상철' 주월 한국대사가 방문 했다.
또한 21일에는 월남공화국 국가원수인 티우 대통령과 구엔 카오키 수상 및 월남군 1군단장인 람장군 일행이 방문, 장병들을 격려해 주었으며,
특히 월남군과 미군사령부에서는 연구반까지 파견하여 진지 견학과 방어 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월남전 사상 중대단위 부대로선 최대의 전과를 올린 청룡 11중대 장병 전원에게 일계급 특진이 내려졌고,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 훈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배장춘" 하사, "김용길" 중사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김기홍" 중위 "이영복" 일병, "김성부" 소위등 특히 수훈을 세운 장병 8명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같이 전 부대장병에게 일계급 특진이 내려진 것은 대한민국 건군사상 두 번째 일이었다.
그 첫번째는 6·25당시 진동리 지구전투에서 해병대의 '김성은'부대 전장병에게 내려졌던 일계급 특진이었다
"살아남은 전 중대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 도착한 여단장은 중대장과 소대장, 그리고 각 병사들의 손을 잡으며, 목이 맨채 말을 잇지 못했다.
"참으로 훌륭히 싸웠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살아남은 11중대의 전장병과 중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한참 말문을 닫고 있던 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 여단장님! 부하들이 전사해서 칭찬 받을 면목조차 없습니다 --
중대장의 보고하는 목소리는 역시 눈물로 끝을 흐리고 있었다. 이에 여단장 김영상 장군은 중대장의 손을 잡으며
--전사자가 10명선에서 멈춘 것은 귀관의 탁월한 지휘력과 책임감 때문임을 감사한다. 전사한 靑龍(청룡)은 軍神(군신)으로서 청사에 빛날 것이다.
그대들의 공적은 세계만방에 울려 퍼질 것이다 --
181 기 아리랑 선배님은 짜빈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신다.
"2중대 방석에서 황폐한 황무지 벌판너머 가맣게 보이는 열한중대 짜빈동....
월남 신삐 특공중대 엄호조 3번탄약수는 개인군장에다가 L.M.G 실탄 두통을 양쪽어께에 메고는 저기 저 들판 어디쯤을 건기의 땡볕아래서 뛰고 기었는데....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개활지를 철버덕 거리며 흙먼지속을 뛰고 굴러면서 안 죽을만한곳에 V.C총알을 한방만 맞고 실려갔으면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고....
열한중대 방석아래로 길게뻗은 벌겋게 녹슨 철뚝길에 배치붙어서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
고국의 반공포스터도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울긋불긋 열차가 달리는구만...... 너와나 우리모두의 아픈세월을 푸르런 들판에 묻고서는.....
짜빈동 ~ 짜빈동을 거기에 두고
남으로 남으로 몇 시간을 내려왔는데
거기 또 ~ 짜빈동 -- 그
광고판의 이름만으로도 가슴 뜨겁다.
짜빈동이여 ~ 영원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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